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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청한 (一日淸閑)이면 일일선(一日仙)이니라

광명기계쟁이 2014. 7. 14. 17:42

 

일일청한 (一日淸閑)이면 일일선(一日仙)이니라

오늘 하루를 맑게 욕심을 끊고 소박하게 살면
오늘 하루는 말로만 듣던 신선이 되는 것이다

 

<명심보감>에서 보면 신선이 되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일단 오늘 하루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먹고 살면 오늘 하루만큼은 신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매일 신선처럼 살면 그 사람은 바로 신선이라는 것입니다.

 

一日淸閑이면 一日仙이니라,

 

일일, 오늘 하루를, 청한, 맑고 한가롭게 산다면, 일일선, 오늘 하루는 신선이 된다!

 

신선처럼 사는 것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맑고 깨끗한 마음가짐을 갖고 한가로운 여유만 있다면 얼마든지

신선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올 여름 내내 몸은 세파에 휘둘리더라도 마음만큼은 유유자적한 신선처럼 사는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울,,24회동창 ~칭구님들도 신선이 한번되어 보시지요~ㅎㅎㅎ

우선,,"신선"된 기념으로 밑에 천만달러를 보내 드리겠읍니다,,

 

聰明思睿守之以愚(총명사예수지이우)총명하고 생각이 뛰어나도 어리석은 체하여야하고

功被天下守之以讓(공피천하수지이양)공이 천하를 덮을 정도라도 겸양하여야 하고

勇力振世守之以怯(용력진세수지이겁)용맹이 세상을 떨칠지라도 늘 조심하여야하고

富有四海守之以謙(부유사해수지이겸)부유한것이 사해를 차지했다 하더라도 겸손하여야하느리라

 

 

 

일일청한(一日淸閑) 일일선(一日仙)이니라

하루를 맑게 살면 그  하루가 한가로운 신선이이니라(結論: 眞理不變)

 

하루를 청한하게 지내면 그 하루가 신선이라.

살을 에이는 차디찬 겨울 바람은 소한의 한기를 업고  

오는데 나무가지마다 살며시 내미는 새순들이 새봄을 알리고 있음에야.
옛날 중국 요순 시대의 "요" 라는 임금이 어느날 불현듯 어릴적의 벗이 생각 났다네.  

보고 싶었던게지. 세상 등지고 사는 벗네를 찿아 가던 길에  

요임금이 동자를 만나 "네  스승이  집에  계시느냐?" 고 물었어.



 

그런데 이동자의 대답은 먼산의 가득한 구름을 가르키며 

 "예, 스승님은 저기 계시옵니다." 라고 했지.
요 임금은 저 구름 아래 속박을 떨친 친구가 도라지나 더덕을 캐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는 생각으로 구름 아래 산으로 갔다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벗은 아니 보이고 산중엔 나무와 구름뿐,

 

 

동자는 이렇게 말을 했다네.

" 산운(山雲)이 바로 그 스승 이옵니다" 라고.

요 임금이 탄식을 하며 말했지.
"저 구름이라는 백성들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니..
청한함의 마음과 여유가 없었다면 역사에  

길이남을 임금이안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리도 찌듬의 울에서 청한함을 찿아 보고  

또 때로는신선 아닌 신선으로 모든 탐욕에서 벗어나 보게나.
요 임금이 당대 최고 최상의 임금이 될 수 있었던 많은 이유중

 

하나가 어진이의 마음과 가끔의 청한함이 아닐까 싶으이.

 

지인용(智仁勇)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세 가지 덕목이 지인용입니다.

 

지, 지혜와 인, 사랑, 용, 그리고 용기, 이 지인용 세 가지 덕목은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덕목으로 <중용>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知仁勇三者(지인용삼자)는 天下之達德也(천하지달덕야)라! 지인용 이 세 가지는 천하의 통달된 인간의 능력이다!

 

여기서 지혜 지자 지(知)는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를 알고자 하는 능력입니다.

 

어질 인자, 인은 그 앎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의 능력입니다.

 

용기 용자, 용은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알려고 하지도 않고 실천하려 하지도 않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아는 용기입니다.

 

지인용,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주변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정확히 알고, 실천하며, 그 앎과 실천이 부족할 때 용기를 내어 또 다시 도전하는 것이 지인용의 본뜻입니다.

 

참된 치유의 힘은 자기마음속에 있다.

 인생은 고해라고 하듯 각박한 현실은 우리네 삶을 고단케 한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자식은 물론 주변까지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되면

사는 게 여간 어렵지 않음을 절감하곤 한다. 남이 보기에 겉으론 태평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작든 크든 늘 근심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논어는 “오늘 하루를 맑고 욕심을 끊으며 소박하게 산다면 하루일망정

신선 같은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一日淸閑 一日仙)”라고 일찍이 경책한 바 있다. 길지 않은 인생,

하루 만이라도 재물, 권력, 명예욕에 가득 찬 ‘허상의 솥’을 비우고 마음 편안히 보내야겠다.

하루가 모여 열흘이 되고 열흘이 쌓여 일생을 이루는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일인가.

그리되면, 우리네 삶이 충실해진다. 살아 있다는 그 자체에 감사하게 된다. 유한한 육신은 사라질지언정

그 족적과 정신은 역사에 남게 되기 때문이다. 명심보감 성심편에 “죽어서 무덤에 가기 전까지는

몸을 백 년 동안 보존하기 어렵고, 무덤에 간 후엔 그 무덤을 백 년 간 보존하기 어렵다

(未歸三尺土 難保百年身 已歸三尺土 難保百年墳)”고 훈계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자연의 순환처럼 순리를 따르는 삶의 자세가 요청된다. 송나라 소옹(邵雍)이 저서

 ‘황극경세전서(皇極經世全書)’에서 “만물의 이치로 만물을 관찰하면 본성을 반영하고,

주관적 나의 눈으로 만물을 보면 사사로운 정만 반영한다(以物觀物 性也, 以我觀物 情也)”고

 경책한 바를 되새겨 볼 때다.

가을의 초입이다. 가뭄과 폭우, 인간관계 등으로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고 알찬 결실을 위한 내공 다지기에

 힘써야 하겠다. 홍자성은 채근담에서 “내 마음을 언제나 고요한 곳에 둔다면 시비와 이해,

그 무엇이 나를 속일 수 있을 것인가(此心 常安在靜中 是非利害 誰能瞞昧我)”라며 세상을 관조했다.

다수 현대인들도 감정이입을 느낄 만하다.